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셀 르페브르 (문단 편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둘러싼 갈등과 [[성 비오 10세회]] 창립 === || [[파일:external/fotos.miarroba.es/274F73C286284F060F663A4F060E85.jpg|height=315]] || [[파일:external/archives.fsspx.org/archbishop-marcel-lefebvre-6.jpg|width=275]] || || 교황 [[비오 12세]]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 교황 [[요한 23세]]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 교황 요한 23세의 요청으로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의욕적으로 참여한 그는 공의회 회기 중에서 변화한 방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에서 그는 기존의 구원관과 전통 교리를 중요시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했는데,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달라진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1970년,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전통을 지지하는 사제들과 신학생들[* 성신신부회 총장직에서 물러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학생들 중 전통주의자들이 접촉을 해왔다.] 및 신자들을 규합하여 스위스에서 [[성 비오 10세회]]를 설립했다. 동시에 첫번째 신학교인 성 비오 10세 신학교[* 에콘 신학교]도 설립했다. 그는 1970년 창립 때부터 1981년까지 성 비오 10세회의 총장직을 수행했다. >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 바쳐, [[가톨릭]] 신앙과 그 신앙의 보전에 반드시 필요한 성전(聖傳)의 수호자인 가톨릭 로마, 지혜와 진리의 여왕인 영원한 로마를 고수한다. 바로 이 충실한 지지 때문에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과 그 공의회 이후에 공의회에서 유래하는 모든 변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들을 거부함이요, 언제나 거부해 왔다. 그것은 신 현대주의(neo-Modernist)와 신 개신교주의(neo-Protestant)의 사조이다.[* 《마르셀 르페브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르레, 한국 성 비오 10세회, p838] 1974년 그가 세운 성 비오 10세 신학교는 교황청의 시찰을 받게 되었다. 시찰자로는 2명의 사제가 파견되었다. 이때 시찰차 온 사제들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신학생들에게 말도 안되는 주장들을 일삼았는데, 대표적으로 가톨릭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발언 등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이는 해당 사제의 자질을 의심해야 될 수준으로, 이런 행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도 아니며, 그 주장 자체로 [[이단]]이다. 그외에도 시찰기간 내내 미사에 한 번도 참례하지 않거나 교회 전통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행각을 여러 번 벌였다. 결국 일련의 사태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를 격분시켰다. 자신이 지켜온 가톨릭 전통이 부정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찰 직후인 1974년 11월 21일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현대주의, 개신교주의, 자유주의에 물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이에 따른 교황청 노선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나타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측 반응에서도 대응 방식의 문제가 드러난다. 이런 사제들의 행각을 봤으면, 교황청에 시찰 온 사제들의 문제점이 있음을 보고하고 제대로 된 다른 시찰단을 보내주면 순명하겠다고 요청할 수도 있는데, 대놓고 11월 21일 선언을 통해 교황청 자체를 반대하는 식의 행보를 보였으니...] [[1974년 11월 21일 선언]]이라고 불리는 이 선언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폐막된 지 얼마 안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에 대한 정면 부정이자, 일개 [[주교]]의 [[교황]]에 대한 불순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 직후 교황청에서는 "[[성 비오 10세회]]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성 비오 10세회는 활동을 계속했다. [[성 비오 10세회]]를 이끌면서, 그는 가톨릭의 전통 전례와 전통 교리를 계속해서 고수하고 피력했다. 이에 따라 교황청과의 갈등도 불거졌다. 성 비오 10세회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아담 샤리에르 프리부르 교구장 주교의 후임 교구장 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지지를 받으면서 성 비오 10세회의 인가 취소와 해체를 주장했다. 바오로 6세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하고 추기경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이름을 거론하며 대주교를 비판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으나 대주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youtube(FW9wJQyOrCg)]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집전한 성 비오 10세회 사제 서품식 1976년 6월 29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사제(성직자)|사제]] 서품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동시에 교황청에서는 대주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사제 서품을 강행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서임권을 박탈해 합법적인 사제 서품권을 박탈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교황청 주교성 장관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사죄해 용서를 받으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교황청에서는 그의 성무집행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합법적 성무집행권을 박탈한다. [youtube(ihlR7EPhgFA)]프랑스 [[릴(프랑스)|릴]]에서의 미사에는 무려 1만여명이 참례했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집행권 박탈 처분을 받음으로써 합법적 성무집행권을 박탈당했음에도 성사들을 계속 집전했다. 한편, 교황청과 대주교간의 마찰이 계속될수록 그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교황청의 성무 집행 정지 처분 이후 프랑스 [[릴(프랑스)|릴]]을 방문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드릴 때에는 무려 1만여명의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했다. 이 미사의 강론에서도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에는 문제점이 많으며 자신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릴에서의 미사 이후에도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드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참관인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의 지지자인 철학자 장 기통도 바오로 6세에게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타협할 것을 요청했다. 바오로 6세와 사적인 친분을 맺고 있던 당시 이탈리아 키에티(Chieti) 대교구장 대주교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황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양측이 화해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릴에서의 미사 이후 주변 지인들의 설득과 중재로 바오로 6세는 1976년 9월 11일 그의 알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 합의를 도출하는데는 실패했다.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잘 알겠으며, 기도와 함께 생각해보겠다"고 답했으나, 심사숙고한 뒤 생각을 바꿔 지인인 [[프랑스인]] 가톨릭 철학자이자 친구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참관인이었던 장 기통[* 장 기통은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순명했지만 동시에 성 비오 10세회의 입장도 이해하는 사람이어서, 나중에 인터뷰에서 본인이 만약 교황의 자리에 있다면 트리엔트 미사를 특정한 상황 하에 허가해줄 생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에게 자신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요청을 거부할 것을 설명하면서 "트리엔트 미사의 자유는 공의회에 대한 평가절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바오로 6세의 판단에도 일리가 있다. 당시에는 새 로마 미사 경본(바오로 6세 미사)의 도입이 채 5년도 안된 시점이었는데, 여기서 성 비오 10세회의 새미사 배격과 트리엔트 미사만 고집하는 행태를 교황이 인정해버린다면 이들은 교황청의 인정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카리스마를 등에 업고 신자들을 계속 끌어모으며 새 미사에 가지 말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새 전례를 배격하는 행보를 더욱 가속화했을 것이고, 결국에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새 전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착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며 몸집을 크게 불린 뒤 교황청과 다시 충돌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또다른 거대한 교회 분열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1. '''공의회 및 새 미사의 유효성과 권위를 르페브르 대주교가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통 가톨릭의 합법적 활동을 허용하던지[* 이 1번 해결책을 선택한 쪽이 현재 교황청 지도 아래 합법적으로 일치되어 활동하고 있는 [[전통 가톨릭]] 단체들(성 베드로 사제회, 그리스도왕회, 착한 목자회 등)이다.] 아니면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를 물리던지''' 둘 중 하나인데, 여기서의 선택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계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적으로 무오류하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무류성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를 인정해줄 수는 없었다. 알현 뒤 그의 요구를 거부한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를 다시금 견책한 것도 그의 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교도권에 대한 불순명이 계속되는데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확고한 [[전통 가톨릭]] 경향에 공감하는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에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추기경]]도 아닌데!)[* [[가톨릭]] 교회법상, 이론적으로 교황 선출 자격은 모든 세례받은 성인 가톨릭교도 남성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관례상, 역사상 적어도 [[추기경]]은 되어야 교황 후보에 적합하다고 여겨져 왔던 상황에서 주교에게, 그것도 전임 교황과 대척점에 섰던 주교에게 표가 갔다는 것은 당시 자유주의자 내지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에게 소수지만 표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 1978년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선출된지 2달 후에 그의 알현을 받고 이야기를 해봤지만, 긍정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교황청 노선을 거부함으로서 교황청과 계속 갈등을 빚는 와중에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매년 [[바티칸]]을 방문했다. 대주교 자신과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과 교황청을 인정하며, 교황과 교황청으로부터 자신과 성 비오 10세회가 승인받길 원한다는 표현이었다. 동시에 교회 위기의 최종적 해결책은 교황과 교황청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대주교 본인 생각의 표현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